최진환

고 최진환 박사님 약력

1936 년 6 월 19 일 출생.
1955 년: 부산 고등학교 졸업.
1965 년: 서울대학교 의학박사 (구강해부학).
1965-1971 년: 서울대학 우석의대 등에서 강의.
1971 년: 미국으로 이민. 장준하, 김구 선생님의 민족주의에 감명을 받아 조국의 민주화, 통일, 인권관련 활동에 참여 시작.
1974 년: USC 치과대졸업.
1980 년 "미국의 정책을 고발한다" , "전두환 정권의 정체와 우리의 각오" 등의 기고문을 신한민보에 냄.
1982 년: "광주수난자돕기회" 참여, 88 년 6 월 해체될 때 까지 3 만 불 이상을 광주로 송금해 5.18 민중항쟁 유가족 및 부상자들의 생활비 및 치료비로 도움을 전함.
1983 년: 민족학교 초대 이사장으로 설립에 참여. 8 년 동안 민족학교 이사장 포함 총 25 년간 민족학교 이사직 역임. 재미한겨레동포연합 회원으로 고 윤한봉 선생님과 미주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2001 년: 휴전선 따라서 국토종단행진(통일 대행진) 에 동참. 과테말라의 장님 개안수술을 위한 후원의 일환으로 Compassion club 주관의 킬리만자로 등반에 동참.
2009 년: "백범김구선생서거 60 주년 추모" 기고 및 60 주년 기념 장학금 증정 에세이 컨테스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시고 기금을 마련 하심. 이후 "LA 사람사는 세상"과 함께 김구 선생, 함석헌 선생, 장준하 선생 기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
2012 년 3 월 27 일 평소 소망하시던 평화 속에 영면하심.

그외 활동 내역:

핵무기 철거요청 10만 명 서명운동
5.18 진상 규명 및 특별법 제정을 위한 재미 동포 서명운동
1983년부터 매년 로스앤젤레스 5.18 민중항쟁 기념 행사에 적극 참여
국제 평화 대행진
조병옥 저 “민중의 노래집”에 적극 참여
백기완 선생돕기 일환으로 통일회관 건립을 위한 “한돌쌓기” 캠페인 참여
장준하 선생 추모 사업 및 함석헌 선생 기념 사업에 동참
JTS(정토회)에서 주관하는 인도에 9개의 우물파주기에 동참
재일동포 서승 교수 화상치료 돕기운동에 동참
2008년부터 폐기종으로 인해 치과의사 은퇴 및 사회 활동 참여를 줄이셨지만 꾸준히 소수 민족 인권 지원 및 한민족 뿌리 알기 사업으로 장준하 기념사업, 백범 김구 선생 및 함석헌 선생 추모 활동을 펼쳐 오셨습니다.

추도의 글 - 정일수님

내 친구 최진환아, 마지막일이지 모른다는 고향 길의 설레임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되었다는 동생 진오 군의 전갈을 받고 동기회 사무실로 달려가 친구들에게 알리고, 솟구치는 그대와의 우정에 오열을 하고 말았소. 사람이 죽고 살기는 하늘의 뜻이라 어쩔 수 없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4월 1일 고국에 온다고 해서 걱정스러운 가운데 반가운 해후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니 말이오.

최진환 박사, 그대는 우리의 가장 자랑스러운 동기 중의 한 사람이었소. 부고 8회 동기회 초창기 회장 때 창간한 동기회 소식 「아스라이」는 반세기 가까운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우리의 침목과 우정의 큰 마당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어, 그대의 기념비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지요.

40여년간의 간고한 미국 생활에서도 당신의 소신이 우리와는 생각이 다를지언정 민족 문제에 접근하여 김구 선생,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의 기념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조국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동포 사회와 함께 했다는 「아름다운 동행상」을 받은데 이어 「제 15회 개척자 상」을 받았으니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소.

최박사, 그대는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 「70 평생을 되돌아볼 때 한마디로 실패자」였다고 토로했지만 기독교적인 신념에 입각한 많은 활동과 박애 정신으로 많은 불우한 자를 도왔고, 훌륭한 가정을 정착시켰으며 북한을 비롯한 세계 수 많은 곳을 여행하는 등 자유 분방한 인생을 살았는데 어째 실패라고 할 수 있겠소.

최진환 그대의 70 평생 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온 우리의 우정은 그대가 말한 것처럼 「축복」이었소. 많은 격려와 사랑에 감사할 뿐이오.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고 미망인과 사랑하는 아들, 딸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마지 않소.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겠소, 다시 만날 기약 없이 마지막 열차를 타고 가는 그대를, 늘 웃는 그대의 모습을 그리면서 열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면서 눈물로 전송하는 심정으로 홀로 서 있소.

내 친구 최진환아, 잘 가시오. 편히 쉬시오. 영생하소서!

2012년 4월 12일 서울에서 정일수

추도의 글 - 박선균 목사

최진환 박사님,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믿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3월 7일이었습니다.

최 박사님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고 한번 뵙고 싶기도 하여 제가 메일을 보냈더니, 13일( 함석헌 선생님 탄신 111주년이 되는 날)에 바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오래 만에 들은 최 박사님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말씀 중에 “4월 2일 한국에 나가서 1개월쯤 머무를 예정이니, 그 때 만나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자” 하셨습니다. 저는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4월 2일 최 박사님은 오시지 않고, 존경하는 사모님이 “최 박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전해주셨습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저와의 약속을 어기신 채, 이렇게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실 수가 있습니까? 너무도 애석하고 슬픔을 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최 박사님을 함석헌 선생님이 생존해 계실 때, 용산구 원효로 <씨알의소리사>에서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눈 일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한동안 소식을 모르고 지내던 어느 날, 바로 작년 3월이었습니다. “그동안 집필했던 성서와 신학에 관한 책을 하나 내고 싶은데 협조해주면 좋겠다.” 는 것입니다. 저는 기꺼이 원고를 받아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박사님은 생각보다도 아주 꼼꼼하게 편집과 교정에 관여하시면서 만들어낸 책이 바로 “어떤 쭉정이가 스친 성서와 신학 올레길”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이 박사님의 일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책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 박사님은 미리 짐작을 하시고 심혈을 기우려 출판해 내신 것이라고 지금에서야 뒤늦게 생각이 됩니다.

책을 만들면서 그 책제목에서 “어떤 쭉정이”라는 말의 깊은 듯을 이해 못하고, 그것을 고치면 어떠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은 거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신 듯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책이 나온 다음 신학자인 김경재 교수께서 “쭉정이라고 하셨지만 최 박사님이야말로 가장 알찬 씨올이시라”고 평을 해 주셨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최 박사님은 씨올의소리 지에도 “쭉정아, 일어나라! 씨올의 소리 외치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기셨습니다. 아주 생기가 넘치고 보기 드문 명문장입니다. 박사님은 저보다도 먼저 학생시절에 함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시면서 꼼꼼히 기록을 해놓으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최 박사님은 의학도이면서도 성서와 신학에 대한 폭 넓은 지식에 전문가도 놀랄 정도였고, 기독교에 몸담고 계셨지만 기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듯 자유인이셨습니다. 미주에 이주해 살고 계시면서도 조국 한국을 잊지 않으시고, 하시는 일을 다 접어놓으시면서, 민주화를 위하여 통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민족주의자 1호’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친구와 친지와 훌륭한 분들을 알고 계셨지만, 최 박사님이 지극히 존경하는 이는 장준하 선생님과 함석헌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친히 장준하 선생님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셨고, 함 선생님이 미주에 오시면 통역을 담당하시면서 보필하신 일을 잊지 못합니다.

지난 해 어느 날 최 박사님은 저에게 전화하시면서 “나는 이제 씨올과 함 선생님만 생각하고 있다.”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찡함을 느꼈습니다. 박사님은 순수하시고 정직하시고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함 선생님의 가신 길이었고, 오염되지 않고 때 묻지 않은 씨올의 삶이었습니다. 최 박사님은 훌륭한 인생을 사셨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너무 잘 하셨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최진환 박사님!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하시고, 장준하 선생님과 함석헌 선생님이 계시는 그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소서.

2012년 4월 14일 한국에서 박선균 올림